오호 통재라, 내 프린터여!
지난 주에 말썽을 부리던 프린터기(印表機)가, 드디어 운명을 하셨다.
영원히 가버린 프린터를 보니, 조선 순조 때 애지중지 하던 바늘을 잃고, 그 안타까움과 애도의 마음을
조침문(弔針文)으로 표현했던 유씨 부인이 떠오른다.
유씨 부인의 글을 빌어서 조인표기문(弔印表機文)으로 내 애도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영원히 운명한 내 프린터기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모씨(某氏)는 두어 자 글로써 인표기(印表機, 프린터)에게 고(告)하노니,
가난한 학자(學者)의 물건 가운데 중요한 것이 인표기(프린터)이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到處)에 흔하기 때문이로다.
이 인표기(印表機)는 한낱 작은 물건이나, 내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기 때문이라.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내 품에 지닌지 우금(于今) 삼년이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을 겨우 진정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懷抱)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3년 전에 하내(河內, Hanoi)에 와 있던 내 아는 선생께서, 그리 아끼고 고이 여기시던 너를 내게 주시거늘,
내 너를 얻어 곁에 두고 애지중지 지금까지 해포 하였더니... 슬프다.
연분(緣分)이 비상(非常)하여, 너를 오늘 잃었으니,
네 비록 무심(無心)한 물건(物件)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迷惑)지 아니하리오.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섭섭하도다.
내 신세(身世) 박복(薄福)하여 이런 오지 하내(河內, Hanoi)에 유배 아닌 유배를 와서,
주위에 즐길 만한 벗도 없어 내 너에게 마음을 붙여, 너로 인해 내 생애(生涯)에 많은 도움을 얻었구나.
허나 오늘 너를 영결(永訣)하니,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이는 귀신(鬼神)이 시기(猜忌)하고 하늘이 미워하심이로다.
아깝다 인표기(印表機)여, 어여쁘다 인표기(印表機)여,
너는 미묘(微妙)한 품질(品質)과 특별(特別)한 재주를 가졌으니,
물중(物中)의 명물(名物)이요, 기계(機械) 중의 쟁쟁(錚錚)이라.
민첩(敏捷)하고 날래기는 백대(百代)의 협객(俠客)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萬古)의 충절(忠節)이라.
그 어려운 한자며 그림이며, 요상한 월남어를 그리도 잘 그려냈건만...
너의 그 민첩하고 신기(神奇)함은 귀신(鬼神)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人力)이 미칠 바리요.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너의 신묘한 재주가 영원히 나와 함께 하길 바래, 이생에 백년 동거(百年同居)바랐건만,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인표기(印表機)여.
금년 사월 십칠일 신시(申時)에, 내 너의 재주를 보고자 청을 했건만,
너의 그 청아하던 소리는 어디가고, 괴성이 나오더니, 깜짝 놀라와라.
아야 아야 네가 병이 났구나, 인표기(印表機)야, 영원히 고치지 못할 병이 났구나.
내 정신(精神)이 아득하고 혼백(魂魄)이 산란(散亂)하여, 마음을 빻아 내는 듯, 두골(頭骨)을 깨쳐 내는 듯,
이윽토록 기색 혼절(氣塞昏絶)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만져 보고 달래 본들, 속절없고 하릴없다.
편작(扁鵲)의 신술(神術)로도 장생불사(長生不死) 못하였네.
하내(河內, Hanoi) 장인(匠人)에게 보여 본들, 어찌 능히 고칠손가.
한 팔을 베어 낸 듯, 한 다리를 베어 낸 듯, 아깝다 인표기(印表機)여,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내 너를 더 어여삐 여겼어야 했는데...
너를 심히 부리고, 삼가지 못한 내 탓이로다.
누구를 한(恨)하며 누구를 원(怨)하리요.
너의 신묘한 재주와 공교(工巧)한 솜씨를 나의 힘으로 어찌 다시 바라리요.
네 비록 물건(物件)이나 무심(無心)하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년 고락(百年苦樂)과 일시 생사(一時生死)를 한 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내 인표기(印表機)여.